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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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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U 가입과 국제활동

대한민국이 ITU에 가입을 신청한 것은 1949년 11월 30일이었으며, 이는 1947년 애틀랜틱시 협약 제1조 제2항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가입 신청은 1950년 3월 18일 표결 결과 61개 연합원 중 34개국의 찬성을 얻었으나, 협약에 규정된 정연합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가입이 부결되었다.
다시 1950년 5월 26일자로 재차 가입신청을 제출하는 한편, 외교 교섭 등 모든 노력을 경주한 결과 그해 10윌 19일을 마감으로 하는 가입 찬부의 표결에서 47 : 6으로 가결됨으로써 가입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6•25사변으로 가입절차가 지연되어 1952년 1월 31일자로 비로소 가입서가 ITU사무총국에 제출됨으로써 동일자로 연합원의 자격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연합원으로서의 국명 「Republic of korea」가 협약 제1부속서에 게재되었는데, 이로써 국제전기통신 사업을 국제적 수준으로 개선 발전시켜 나가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가입은 대한제국이 1897년에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한지 반세기만의 일이었다. 국제무대로의 진출이 지연되었음은 그만큼 이 땅의 전기통신발달사가 바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당시의 ITU에의 가입이 조국 광복 이후 UPU에의 정식가입(1952년 1월 19일)과 거의 때를 같이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제네바 회의에 참석한 각국대표우리 나라가 연합원이란 자격으로 ITU 회의에 최초로 참석하게 된 것은 가입 9개월 후인 1952년 10월 3일부터 12월 22일까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전권위원회의였다.
대표로는 이재곤·최건 2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회의는 UN의 전문기관으로 발족한 후 최초로 열린 중요 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80개국의 대표와 기타 기관 대표를 합하여 35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희의에서도 미소를 주축으로 하는 양 진영으로 대립되어 신 연합원 가입문제에 대하여 이미 사무적 절차에 의하여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회 벽두부터 양측의 예리한 설전이 되풀이되었다.
즉,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 등 9개국의 공산블록 대표들은 국토가 양단되어 있는 한국·중화민국·베트남 및 서독의 대표를 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의장과 기타 대다수의 대표들은 ITU 회의의 근본 성격을 들어 이 회의에서의 정치적 논쟁이 타당하지 않음을 역설하였으며, 특히 미국 대표는 대한민국 대표가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합법적임을 밝히고 이 문제를 표결로써 결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채택되어 표결 결과 소련측의 6개국만이 반대하였고 기타 국가는 한국의 참석에 찬표를 던졌던 것이다. 이리하여 1949년 임시주파수위원회에서 옵저버 자격으로 국제적 진출을 한 이래 처음으로 공산권의 방해를 물리치고 연합원으로서 당당히 참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가입권은 확고부동한 기정사실로 되었고 정부 수립 이후 4년만에 이루어진 이 회의 참석이야말로 우리나라 전기통신의 국제적 진출에 있어서 잊혀지지 않는 한 대목이라 할 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주로 1947년 애틀랜틱시회의에서 체결한 국제전기통신협약에 대한 기술적인 검토 및 수정사항에 대한 심의를 하였으며 운영·신임상·조약·규칙·재정·예산·UN관계·편집 등의 8개 위원회로 나뉘어 진행되었고, 12월 22일에 개정된 협약에 조인을 마쳤다.

이 협약은 1954년 1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우리나라는 비회이 지연되어 1954년 9월 1일부터 공포 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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